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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류학 - 현대패션과 서양복식문화사

근대 -(2) 로맨틱 스타일 시대 복식(1820~1850)

by 루아맘amber 2023. 2. 22.

1. 시대적 배경

 19세기 중엽에는 낭만주의가 유럽 내에 확산되었는데, 정치적으로는 왕정복고(1814~1830)와 7월 왕정(1830~1848), 그리고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의 제2 제정 이전까지의 시기이며 새로 등장한 시민 계급에 의해 시민사회가 성립되는 과도기였다. 

 나폴레옹 1세가 물러나고 루이 16세의 동생인 18세가 파리로 귀환하여 왕위 계승을 받았으나 급격히 변화한 사회를 적응하지 못하고 혼란한 정치적 상황을 수습하지 못하자 시민들이 1830년 7월 혁명을 일으켜 루이 필리프(Louis Philippe, 1773~1850) '시민의 왕'으로 추대하게 된다. 그러나 소극적인 정치로 인해 귀족들뿐만 아니라 노동자 세력의 위협을 받게 되고 이에 맞서 탄압 정책을 감행하였다. 이에 반발하여 시민혁명이 다시 일어나게 되고 나라는 다시 혼란한 정국에 빠지게 된다. 이때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Louis Napoleon, 1808~1873)이 나폴레옹 3세로 칭하며 즉위하면서 제2 제정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자유주의에 대한 동경이 커지고, 부르주아 사회의 문제점들이 드러나는 등 사회적, 정치적으로 혼란해지자 이를 타개할 수단으로 낭만주의(Romanticism)가 시대사조로 등장하였다. 낭만주의는 17~18세기의 고전주의와는 상반되게 인간의 감정에 따라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것, 야성적인 것, 억제되지 않은 것 등을 강조하는 사상이다. 음악에서는 베토벤, 슈베르트와 같은 음악의 거장들이 낭만주의 음악을 주도했고, 특히 미술 분야에서는 낭만주의 경향으로 신고전주의(Neo-Classicism)가 탄생했다.

건축에서는 중세 고딕 양식이 부분적으로 나타났다. 사회 전반에 낭만주의가 고조되면서 자산을 축적한 부유한 시민 계층은 정치적 개입을 하지 않고 문학·음악·미술에 몰두하며 무도회, 미술전시, 오페라 관람을 즐기는 등 정서적, 감상적으로 치우치는 경향을 보였다.

 낭만주의 경향은 1820년 이후 특히 여자 복식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X자 실루엣의 궁정복과 무도 의상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끄는 데 공헌하였다.

 

2. 복식

1) 개요

 낭만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인체에 대한 미의식이 변화하면서 낭만주의 스타일의 복식이 형성하였는데, 고대 그리스인들이 발견한 육체의 이상형과 질서를 인간의 감정과 결합하여 인체의 미의식을 표현하고자 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신체를 드러내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잘록하게 조인 허리, 어깨를 노출한 데콜테, 부풀린 스커트 등으로 강조했다. 이를 위해 다트, 심, 솔기와 같은 구조적 라인이 개발되었고, 재단과 봉제 기술의 발달로 앞과 뒤의 모양이 다른 입체적인 복식이 만들어졌다.

 당시 자동 방적기와 벨벳 직조기계 등이 개발되면서 다채롭고 다양한 직물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져 직물 산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자본주의로 인해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들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서 로맨틱 스타일 복식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부르주아적 기반 위에 세워진 왕정복고 시대의 복식은 다시 돌아온 귀족풍의 화려함을 뽐내며 낭만적 경향을 띠게 되었다. 이 시대의 의상은 파스텔 톤이 주를 이루었고, 리본과 레이스로 장식하였으며, 코르셋과 페티코트를 입어 과장된 X자형 실루엣을 만들었다. 이러한 경향은 여성복뿐만 아니라 남성복에서도 나타났다. 

 

2) 여자 복식

 (1) 가운

 낭만주의 스타일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820~1822년경이다. 복식의 주요한 특징은 X자형 실루엣과 소매의 형태에 있다. 잘록한 허리를 위해 코르셋을 착용하였고, 스커트는 확대, 팽창되는 경향을 보였다. 스커트에 점차 장식용 레이스나 프릴을 많이 달게 됨으로써 스커트가 무거워지자 페티코트가 다시 등장했다. 1845년경에는 페티코트를 여러 벌 겹쳐 입는 착용 방법도 등장했다.

 로브의 소매는 1820년 이후 퍼프(puff) 소매가 점점 더 커지고 길이도 팔꿈치까지 내려왔다. 1825년에는 소매 안쪽에 충전물을 넣은 후에 소매 위에 또 한 장의 소매를 덧붙인 거대한 소매가 유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837년을 기점으로 소매의 부풀림은 작아지기 시작했고 1840년 후반에는 어깨에서 자연스럽게 내려오는 형태로 바뀌었다. 

 1822년경에는 목선을 드러내지 않은 하이네크(high neck)에 주름을 잡은 칼라를 달고, 레이스 장식이나 주름으로 허리, 소매, 스커트 단 등을 장식하여 로코코 스타일의 귀족적인 화려함을 표현했다. 그러나 잘록한 허리와 넓게 퍼지는 스커트의 실루엣이 강조되면서 1836년경에는 어깨를 드러낸 드롭 숄더 라인(dropped shoulder line)에 넓은 어깨 장식 칼라인 펠레린(pelerine) 등을 달아서 낭만주의적 여성미를 드러냈다. 

 소재는 신체의 곡선미를 드러내기 위해 얇은 모슬린이나 거즈, 능직의 면직물 등을 사용했으며, 프릴, 레이스, 리본 등으로 장식했다. 색상은 분홍색, 청색 등 밝은 색을 주로 선호하였다. 

 

 (2) 외투

  초기의 대표적 여성용 외투는 추위를 막기 위해 입었던 겨울용 외투인 르댕고트와 온화한 날씨에 입었던 스펜서재킷이었다. 소매가 커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숄(shawl)과 케이프(cape)를 많이 이용하였다. 1840년대에 소매가 좁아지면서 외투를 입을 수 있었으나 여전히 숄과 케이프의 인기가 높아서 1860년대까지 애용되었다. 

 

3) 남자 복식

 (1) 코트

  여자 복식의 X자형 실루엣에 영향을 받아 날씬해 보이는 실루엣이 남자 복식에 반영이 되었다. 그리하여 남자들도 코르셋을 착용하였으며, 코트도 넓은 어깨, 가는 허리, 둥근 엉덩이, 불룩한 가슴 등의 형태를 이루었다. 또한 X자형 실루엣을 위해 가슴선을 강조하여 단추를 올려 달았고, 겹치는 라펠을 더블로 여며서 가슴부위에 부피감을 주었다. 어깨에는 패드를 넣어 넓어 보이게 하였고 코트의 밑단은 퍼지도록 하여 넓은 어깨와 대조를 이루어 허리가 더 날씬해 보이게 했다.

 초기에는 테일 코트(tail coat)를 많이 착용하였고 중반에는 프록코트(frock coat)가 인기 있었다. 특히 프록코트의 실용성으로 19세기 남성 복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후반에는 오늘날의 재킷처럼 기장이 짧은 슈트 코트(suit coat)가 등장하여 인기를 끌었다.

 

 (2) 조끼

  왕정복고 시기의 화려한 의복이 사라지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남은 화려한 복식의 형태는 베스트(vest)였다. 이는 후에 남성 양복 조끼의 원조가 되었다. 주로 체크, 스트라이프의 벨벳과 실크 소재를 사용하여 밝고 화려한 느낌을 주었고 1830년대에는 숄칼라, 롤칼라 등이 달리기도 했고 상체에 부피감을 더하기 위해 두 벌의 조끼를 겹쳐 입기도 하였다. 여밈은 싱글과 더블 모두 사용되었다. 

 

(3) 바지

 1820년대에는 남자 바지에 플리츠를 많이 잡아서 풍성한 실루엣을 지니고 있었으며, 바짓 부리에 스트랩이 달린 고리바지가 유행했다. 1830년대에는 바지가 다리에 꼭 맞는 경향이 있었으나 1840년경에는 여유가 있었다. 대부분은 긴바지를 착용했고 스트라이프나 체크무늬를 선호하였다. 

 

(4) 외투

 르댕고트와 케이프를 즐겨 입었으며, 이전 시대에 착용하던 그레이트 코트(케릭) 또한 여전히 착용했다. 르댕고트는 여성 복식의 X자형 실루엣을 영향을 받아 허리를 가늘게 조이고 스커트 부분은 넓어졌다. 어깨는 넓게 벌어지고 소매는 손목으로 내려갈수록 좁아졌다. 앞여밈은 일반적으로 더블이었으나 싱글 여밈도 있었다. 기장은 무릎이나 발목까지 내려왔다. 

 1830년대부터 케이프를 즐겨 착용했고 1840년경까지는 길이가 무릎 위 또는 발목까지 오는 등 다양했다. 현대의 남성용 코트와 유사한 박스형 체스터필드 코트(chesterfield coat)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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